고구려시대의 명장 양만춘[ 楊萬春 ] 장군과 안시성(安市城)
글쓴이 : 신영철
작성일 : 12-06-27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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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고구려시대의 명장. 보장왕 때의 안시성(安市城) 성주이다. 그의 이름은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안시성 성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 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에 의하면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으로 밝혀졌다.

그는 지금의 만주 요녕성(遼寧省) 해성(海城)의 동남쪽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되는 안시성의 성주였다. 안시성은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 자리잡은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군사들 또한 정예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했을 때,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이에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연개소문은 결국 안시성 성주의 직책을 그대로 맡겼다. 이는 그가 용기와 소신 있는 인물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은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 군대의 주력부대의 침공으로 요동지역에 있던 개모성(蓋牟城 : 撫順 부근)과 비사성(卑沙城 : 大連灣 北岸)이 함락되었다. 이어 당나라 태종의 지휘로 요동성(遼東城 : 遼陽)과 백암성(白巖城 : 遼陽 동남)도 당나라 군대에 함락되었다.

당나라 군대는 다음 공격목표를 놓고 수뇌부 사이에 이견이 있었으나, 이세적(李世勣)의 건의로 안시성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 때 고구려는 당나라 군대에 포위된 안시성을 지키기 위해 15만 병력을 출동시켰으나 안시성 근처 8리지점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한 안시성에서 그를 비롯한 병사와 주민들은 하나로 뭉쳐 완강히 저항하였다. 안시성 공격이 여의치 않자 당나라 군대는 공격목표를 그보다 훨씬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烏骨城 : 만주 鳳凰 남쪽의 高麗山城)으로 변경하고자 논의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을 계속 공격하기로 의견이 모아져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당나라 군대는 연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어 60여일 동안 높은 흙산을 쌓아, 이를 발판으로 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당나라군대는 하루에 6, 7회의 공격을 가하고 마지막 3일 동안은 전력을 다해 총 공세를 펼쳤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마침 9월에 접어들어 요동의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했고, 군량 또한 다하자 당나라 태종은 포위를 풀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그는 성루에 올라 송별의 예(禮)를 표하고, 당나라 태종은 그의 용전을 높이 평가해 비단 100필을 주면서 왕에 대한 충성을 격려하였다.

고려 후기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정관음 貞觀吟〉이라는 시와 이곡(李穀)의 ≪가정집 稼亭集≫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했다고 한다.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에 반대해 끝까지 저항한 11성(城) 가운데 안시성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그의 생존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백과 용기가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